베를린 분할 점령과 냉전의 시작

1. 개요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국토의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고 독일인들은 전쟁의 결과에 대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극도의 공황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600만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홀로코스트의 상흔은 독일 민족이라는 자존감을 완전히 내동댕이치게 만들었고 ‘독일적인 것’에 대한 모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히틀러의 망상을 깨부수고 승리를 쟁취한 연합군의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은 독일을 잠정적으로 분할 점령했지만, 서로 간의 심각한 의견 불일치로 인해 1949년 서독과 동독이 따로 건국되기에 이른다. 소련은 1948년 6월부터 11개월 동안 서독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길을 봉쇄해 버림으로써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전승 4개국의 독일 분할 점령

1) 전후의 독일 상황

패전 후의 독일은 모든 것이 멈춰 버린 ‘제로의 시간’으로 돌입했다. 괴테와 쉴러, 칸트를 통해 번성했던 문화를 꽃 피웠던 나라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빠져버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을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시켰으며 모든 ‘독일적인 것’이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나치가 독일의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연합국의 끊임없는 폭격으로 인해 국토는 황폐화되고 교통, 주거, 산업은 심각하게 파괴되고 마비되었다.

국민들은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독일 동부 지역의 곡창 지대를 스탈린그라드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진군함으로써 식량의 공급이 어려워졌다. 소련군을 피해 동프로이센 및 주데텐란드 등의 동부 지역으로부터 1,200만 명의 피난민들이 밀려 들었다. 수도 베를린에만 1945년 7월부터 불과 4달 만에 130만 명의 피난민이 유입되었다. 전후 1947-1948년의 농작물 생산량은 1939년 대비 30%이상이 감소되었지만 인구는 1,200만 명이나 급증해서 도회지의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2) 연합군 통제 위원회(ACC, Allied Control Council)

독일을 점령한 전승 4개국은 의견 불일치로 인해 독일을 점령통치하는 데 일관성이 부족했다. 독일군이 무조건적으로 항복한 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전승 4개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하여 다스렸는데, 1945년 7월 열렸던 포츠담 회의에서 독일을 4개 지역으로 나눠 통치한다는 구체안이 합의되었다. 결과적으로 동독지역은 소련이 통치하고 서독지역은 북부는 영국, 중남부는 미국, 중서부는 프랑스가 점령했다. 독일 점령 통치에 대한 전체 의결기구인 연합국통제위원회(ACC)가 설립되었고 ACC가 베를린과 독일전체에 대한 주권을 행사했다.

3) 서방 3개국과 소련의 갈등

연합국통제위원회(ACC)의 의사결정 방식은 만장일치제였다. 그러나 상호간의 합의가 이루어 지지 않을 경우에는 점령지의 통치방식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점령지에 따라 통치방식에 차이가 생겼다. 소련은 독일에 대한 배상 책임을 물어 점령지의 공장들을 철거해서 자국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각자의 점령지를 통합해서 Bi-Zone으로 묶어 운영했고 프랑스도 이에 호응했다. 이러한 통치 방식의 차이로 인해 서방 3개국과 소련 사이에는 갈등이 심화되었고 소련은 갑작스럽게 ACC를 탈퇴해버렸다.

3. 베를린 공수작전

1) 원인

서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샬에 의해서 기획된 유럽부흥계획인 마샬플랜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등의 서유럽국가들을 지원하고 본격적인 독일재건에 나섰다. 그리고 1948년 서방은 옛 독일의 마르크화를 없애고 도이치마르크를 도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ACC의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련은 독자적으로 동독에 동독 마르크화를 도입하고 서베를린으로 가는 육로와 해상로를 통제하다 마침내 1948년 6월 24일 부터 완전히 봉쇄해버렸다.

2) 내용

서베를린은 소련의 점령지 안에 있는 도시로 접근로를 막아버리면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전쟁 후 3년 동안 육상로와 해상로를 통해 서베를린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서방은 소련에 접근로 봉쇄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지만 소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서베를린에는 겨우 한 달 치의 식량과 연료밖에 없었기 때문에 접근로 봉쇄를 통해 소련은 독일 통치 방식에 대해 서방의 양보를 얻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서방은 결코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공수작전을 통해 식량과 의약품, 석탄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미국 공군의 주도하에 영국 공군과 함께 27만 회가 넘는 공수작전이 이루어졌다. 하루 평균 7,000톤의 물자가 공수되었다. 수송기 충돌 사고로 101명의 승조원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3) 결과

베를린 공수작전은 미국과 소련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다. 그것은 단순한 군사작전의 의미를 넘어 미소 냉전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트루만 대통령은  서베를린과 서독에 미군을 주둔시키기로 결정했다. 더 나아가서 결국 1949년 미국의 주도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설립되었으며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참여하였다. 나토 회원국이 침략을 받으면 다른 회원국이 자동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는 집단 안보기구로서 오늘날에도 유럽 방위의 보루가 되고 있으며 수 많은 유럽 국가들이 추가로 나토에 가입했다.

4. 결론

동서의 냉전의 시작으로 인해 독일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동서로 분단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만 하더라도 미국과 소련을 히틀러라는 희대의 거악을 물리치기 위해 손을 잡았다. 그러나 급격히 적대 관계로 변모한 두 국가로 인해 냉전은 시작되었고 동유럽은 소련의 세력권으로 서유럽은 미국의 세력권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버렸다. 그 후 소련의 붕괴로 말미암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약 40년 동안 냉전은 지속되었고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고통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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