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

개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많은 변혁을 겪었던 시기였습니다.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마구 화폐를 찍어내는 바람에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는 1923년 말에는 1913년 전쟁 전과 비교해서 1조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겨우 10년 만에 경제부흥을 앞세운 리더쉽에 대한 국민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독일의 생산고는 1928년에 전쟁 전의 수준을 회복했습니다.  바이바르 공화국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역사에 있어서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룬 시기였습니다.

1.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독일 제국의 종말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 제국의 붕괴는 독일에 새로운 민주 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0월, 독일에 민주적인 정부가 구성되지 않으면 휴전에 응할 수 없다고 압박했습니다. 그로 인해 황제 빌헬름 2세는 폐위됐고 네덜란드로 도피했습니다. 그리고 패전의 격심한 혼란 속에서 1918년 8월 11일 바이마르 헌법이 공표되었습니다.

바이마르 헌법

바이마르 공화국은 바이마르 헌법에 명시된 민주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설립되었으며, 이 헌법은 1843년 3월 혁명 이후 제정되었지만 실행되지 못하고 있던 헌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헌법은 언론과 결사, 집회, 양심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과 함께 주요 기간 산업의 국유화 원칙도 명시했습니다. 또한 비례 대표제를 도입해 소수 정당이라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기 7년의 강력한 대통령제를 채택했으며 대통령은 군통수권을 보유하고 각료 임명권, 하원 소집 및 해산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 정부는 국가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2. 민주주의와 정치적 불안정

정치적 불안정

바이마르 공화국은 정치적 양극화와 이념적 갈등 속에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공산당, 급진사민당과 같은 극좌에서 나치당과 같은 극우에 이르는 정당들의 난립은 강력한 통치를 방해하고 잦은 정권 교체로 이어졌습니다.

극단주의의 위협

공산당과 나치당과 같은 극단주의 운동의 부상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안정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폭력과 암살이 점점 더 빈번해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불안감과 공포감이 커졌습니다. 히틀러의 나치와 같은 극우파들은 공산주의자와 연합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쿠테타를 도모하기도 했지만 진압되었습니다.

3. 문화적 번영

독일 문화의 황금기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황금의 20년”으로 알려진 문화와 예술의 번영기를 이루었습니다. 1920년대 말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제작된 영화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영화를 제작했고 영화 시장은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베를린은 표현주의, 다다이즘, 바우하우스와 같은 사조가 현대 미술과 건축에 많은 영향을 남기는 건축과 예술 실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바우하우스는 건축을 중심으로 조각과 회화 등 각기 분산된 모든 예술 분야를 통합하고자 시도하였으며 ‘생활 속의 디자인’을 실천하고자 시도했습니다.

문학과 지성의 르네상스

바이마르 시대에는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작가들이 정체성, 소외, 사회 변화라는 주제를 내세운 중요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독일 문학과 철학의 르네상스를 이루었습니다.

4. 경제적 도전과 초인플레이션

전쟁 배상금과 경제 위기

바이마르 공화국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배상금 지급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배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돈을 찍어내기로 한 정부의 결정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은 국민들의 구매력을 약화시키고 엄청난 경제 불황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구스타브 슈트레제만이 1924년부터 외무장관이 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적 안정기로 들어서게 됩니다.

도스 안과 경제 회복

슈트레제만은 과감히 화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수십만 퍼센트에 이르는 초인플레이션을 진정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외국 자본의 유입이 필수적이었는데 월가의 금융기관과 협상을 통해 2억 달러의 차관을 들여 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스 안이라 불리는데 1924년에 도입된 이  도스 안은 독일에 차관을 제공하고 배상금 지불 완화 조건도 포함되었습니다. 또 1929년에 체결된 영 안은 배상금의 규모를 20%까지 감축해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급격히 경제를 회복시켰지만, 1920년대 후반의 세계 경제침체에 이은 1929년의 세계적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독일은 다시 경제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결론

바이마르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문화적 르네상스을 이루었지만,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했던 독일 역사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시대였습니다. 결국 전체주의의 부상으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짧은 수명을 다하게 되지만, 바이마르 시대는 현대 독일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 짧은 시대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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