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제1차 세계대전

1.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분쟁 중 하나로 전 세계의 주요 강대국들이 이 전쟁에 개입되었습니다. 이 전쟁이 발발한 원인과 독일의 역할,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전쟁의 확대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 급속히 부상했던  독일의 공격적 외교 정책과 팽창주의적 군비 증강은 늘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1914년 페르디난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에 의해 살해되면서 전쟁에 불이 붙었습니다.

군사 동맹의 충돌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이후 불가리아 등과 함께 삼국동맹의 주축이었습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에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편을 들었고 독일은 러시아에 세르비아 편에 서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 요구를 거부하자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이어 러시아와 함께 삼국협상의 일원이었던 프랑스에도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략하자 영국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맹에 가담하면서 이 전쟁은 결국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대전으로 비화하게 되었습니다.

슐리펜 계획과 서부 전선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진 독일의 군사 전략은 서쪽에서 프랑스를 빠르게 격파한 후 동쪽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전력을 집중하여 빠른 승리를 거두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서부 전선에서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실패하면서 수 년간의 참호전과 엄청난 사상자를 초래했습니다. 10만 명의 영국 원정군이 프랑스로 건너가 독일군의 신속한 돌파를 저지했고 스위스 국경부터 영국해협에 이르는 1,000Km에 이르는 긴 참호가 구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4년 동안 지루한 참호전으로 이어져 천문학적인 사상자를 발생시켰습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

2년 반 넘게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지속되던 전쟁은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전황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독일이 미국과 같은 중립국을 포함한 상선과 여객선을 상대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감행함으로 인해 미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가 침몰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128명의 미국인이 숨지자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삼국협상 편에 서서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독일 편에 섰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등이 동부 전선에서 패배했고 독일은 1918년 11월 11일 결국 휴전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은 종식되었습니다.

2.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쟁

식민지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유럽 열강 간의 군비 경쟁은 긴장을 촉발했고 결국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외교적 균형을 모색하기 위해 식민지 정책을 제한적으로 추진했던 것과는 달리 빌헬름 2세의 독일이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면서 영국과 프랑스 같은 기존 식민지 제국과의 갈등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

20세기 초 유럽 전역에는 팽창적 민족주의와 군국주의가 만연했습니다. 독일의 급속한 산업화와 군사력 확장은 유럽 대륙의 세력 균형을 위협했고, 상호 견제와 불신이 급격히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동맹 시스템

세력 균형을 모색하던 열강들은 복잡한 동맹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삼국협상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의 삼국동맹이 대치하는 구조를 형성하였습니다. 결국 그러한 동맹간의 갈등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다자 분쟁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은 완전한 승리를 원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 독일은 영국을 꺾고 유럽의 최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품었지만 영국이 이를 저지했고, 경제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의 패전을 복수하고 독일을 꺾고 싶어 했습니다.

3.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

베르사유 조약

1919년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 후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에 혹독한 고통을 안겼습니다. 독일 총생산의 80%가 넘는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부과했으며 징병제도를 폐지해서 군 병력을 최소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탱크, 잠수함 등의 중화기의 보유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71년 프랑스로부터 빼앗은 알사스 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되돌려 주었으며 슐레지엔 지방을 떼내어 신생국인 폴란드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라인 지방이 비무장 지역이 되어 15년간 프랑스에 점령 당했습니다.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은 인구의 15%, 영토의 10%를 잃었습니다.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독일과 다른 유럽 국가들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등 제국의 붕괴로 국경이 재조정되고 새로운 민족 국가의 등장과 동시에 민족적 긴장과 불안정성도 팽배해졌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그저 독일어를 쓰는 작은 국가로 전락했으며 생제르맹 조약으로 인해 독일과의 합병이 원천 봉쇄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가혹함으로 인해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는 파괴되었으며 이는 히틀러라는 새로운 독재자의 출현을 위한 새로운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파시즘의 부상과 제2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혼란은 극단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을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독일에서는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족주의 정서가 급부상하게 되었고 결국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라는 괴물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1939년 9월1일 히틀러는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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