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식민주의

1. 독일 식민주의 개요

독일 식민주의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식민지 개척의 후발 주자였던 독일이 해외 제국을 건설하고 확장을 시도했던 시기를 말합니다.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개척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독일이 식민지 개척에 뛰어든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스미르크가 총리로 재직하고 있던 동안 독일은 식민지 개척에 무척 신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식민지 개척에 몰두하고 있던 때라 독일이 식민지 개척에 나서게 되면 영국과의 관계가 소원해 지는 것은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일은 주변의 열강들에게 현상 유지에 만족한다는 외교 정책의 진정성을 식민지 개척에 소극적으로 임함으로써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사임한 후 빌헬름 2세는 식민지 개척에 대한 방향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해외 식민지 확보에 나서게 됩니다.

2. 독일 식민주의의 동기

경제적 동기

19세기 독일의 산업화는 중산층의 부상을 가져왔고 그들에게는 원자재를 조달하고 생산된 상품을 판매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미개 지역에 문명을 전파한다는 ‘문명화 임무’를 내세워 식민지 개척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독일도 그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무, 광물, 농산물과 같은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소유가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정치적 동기

빌헬름 2세는 독일의 노동자 세력이 강화 됨에 따라 중산층과 민족주의자들이 요구하던 해외 식민지 개척에 동조함으로써 노동자 세력의 강화를 저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전독일연맹과 같은 중산층.민족주의 세력의 식민지 개척에 관한 요구를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뒤늦게 통일된 독일은 세계 주요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식민지 획득은 국가 위신을 높이고 영국, 프랑스와 같은 기존 식민지 제국과 동등한 지위를 쟁취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독일 식민지 및 지배 방식

독일의 주요 식민지

1884~1885년 까지 독일은 동아프리카 토고, 카메룬, 솔로몬 제도, 마샬 제도 등에 식민지를 설립했습니다. 그 곳은 주로 프랑스 및 영국과 경쟁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식민지들은 독일의 통치를 받았고, 정치, 경제, 사회에 큰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태평양에서도 독일은 사모아와 뉴기니 일부와 같은 곳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도 독일은 식민 통치를 통해 값싸게 자원을 조달했습니다.

식민지 지배 방식

독일 영토의 식민지 행정은 독일의 관료들을 통한 중앙집권적 통제 방식이었습니다. 콜로니얼빔테로 대표되는 독일 관리들은 식민지의 경제적 착취를 극대화하고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 정책을 주도했습니다.

플랜테이션 경제

독일 식민지는 특히 아프리카에서 고무, 코코아, 팜유와 같은 현금 작물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농업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독일 기업과 정착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독일 식민지는 농업 외에도 금, 다이아몬드, 구리 등 광물 채굴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4. 독일 식민주의의 결과

문화 제국주의와 동화 정책

독일 식민주의는 토착민에게 유럽의 문화와 가치를 강요했습니다. 여타의 식민주의자들처럼 동화 정책은 식민지의 독일화를 위해 현지의 정체성과 언어를 지우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원주민 공동체의 저항을 물러 일으켰습니다. 나미비아의 헤레로와 나마 봉기와 같은 저항 운동은 독일 식민주의의 잔혹성을 부각시키는 사건들입니다. 1940년 벌어진 이 무장 봉기를 독일은 군을 동원해 진압하였으며 2만~10만 명의 주민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1차 세계 대전과 식민지

독일의 식민지 정책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주변 열강들과 지속적인 갈등을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1897년부터 독일은 본격적으로 함대를 건설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이는 식민지 건설에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영국을 따라 잡겠다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전함 건조 계획은 최고의 해군력을 보유했던 영국을 자극시켜 전함 건조 경쟁을 야기했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독일은 1899년 베를린과 빈, 바그다드를 철도로 연결하겠다는 3B 정책에 착수하면서 러시아와 영국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공세적인 세력 확장 정책은 영국, 프랑스,러시아의 삼국협상을 완성하게 했고 결국 이러한 독일의 식민 정책은 1차 세계대전의 근본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일은 식민지 소유지를 잃었고, 연합국들은 연합국의 위임에 따라 식민지를 재분배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식민주의는 식민지 국민들에게 사회 경제적 문화적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역사적 재평가

최근 수십 년 동안 독일의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식민지에 미친 영향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심판, 사과, 배상에 대한 요구가 탄력을 받고 있으며, 실질적 책임 및 배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습니다. 그러한 일례로 헤레로, 나마족의 진압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독일 정부는 그 사건을 ‘인종학살’이라고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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