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과 독일

개요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의 역사에서 커다란 획을 차지하는 변혁의 시기였으며 독일의 근대화와 민족주의를 촉진했다. 이미 독일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계몽주의 및 경제적 발전에 힘입어 꾸준히 경제.사회.문화를 포함 전반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중이었다. 그런 가운데 나폴레옹이라는 외부 세력의 자극 독일 내부의 발전이 서로 결합하여 독일 민족이라는 개념이 점차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과 이 전쟁이 독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 본다.

나폴레옹 전쟁

나폴레옹 전쟁의 배경

나폴레옹 전쟁의 뿌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시민 혁명을 통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프랑스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92년 나폴레옹이 발미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 같은 연합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똘똘 뭉쳐있던 프랑스 시민군의 충성심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아직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던  독일은 프로이센 이외의 라인 지역에 있던 많은 제후국들은 여전히 라인 동맹이라는 프랑스의 위성 국가 연합으로서 프랑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프로이센의 숙적이던 작센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은 이러한 강력한 프랑스의 부상에 맞서기 위해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더불어 대 프랑스 동맹을 형성했다.

나폴레옹과 프로이센의 전쟁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1797년 즉위 이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중립 노선을 유지했다.나폴레옹이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 전투를 벌일 때는 프로이센 영토를 통과 하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경력한 국방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중립은 무의미했다. 1806년 프로이센은 러시아와의 동맹 체결을 고려하던 차에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호되게 당한다. 프로이센은 비슷한 규모의 군대로 나폴레옹과 전투를 했음에도 나폴레옹에 참패했다. 나폴레옹은 베를린에 입성했고 베를린 칙령을 발표해 프로이센의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했다. 프로이센은 1807년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한 후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와 프리틀란드에서 프랑스와 격렬히 싸웠지만 대패했으며 나라의 운명을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에게 맡기는 신세가 되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틸지트조약을 통해 서로의 세력을 인정했지만,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영토의 절반을 가져갔다. 프로이센은 군대도 대폭 축소되었고 프랑스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겨우 러시아에 의존해 국가를 존속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독일에 미친 영향

독일 민족주의의 태동

1813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퇴각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의 백성에게’라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프로이센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주변의 영방 국가 사람들도 독일인으로 호명했다.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 대항 하는 중심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한 페이지 남짓한 호소문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나폴레옹을 규탄하고 독일 민족은 하나라는 것을 규정하는 민족주의적인 문학 작품이 연이어 발표되기도 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독일 민족의 명운을 건 전쟁으로 여겼다. 시민들이 자원 입대했고 군대를 지원하기 위한 물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 주도권 경쟁

프로이센은  비해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역할이 축소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중부 유럽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의 확대를 우려하여 주저하다가 뒤늦게 영국이 주도하는 반 프랑스 동맹에 합류했다. 그런 탓에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의 질서를 논하던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비해 얻어낸 영토가 많지 않았다. 독일어를 쓰는 강대국이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가지고 줄곧 경쟁했다.

군대와 행정의 개혁

나폴레옹에게 치욕을 당한 프로이센은 왕의 주도하에 관료와 군인, 법률가들이 주체가 되어 군의 개혁을 단행했다. 귀족 출신만 장교가 될 수 있었던 구습을 철폐하고 능력에 따라 장교가 될 수 있도록 자격 요건을 개방했다. 징병제를 도입하고 ‘전쟁론’을 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를 포함하는 군사재편위원회를 설치해서 패전의 책임자들을 퇴진시켰다.

중앙 행정 조직을 권력을 집중하는 대신 결과에 책임을 지우는 현대식 내각 제도에 유사하게 만들었다. 국가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귀족의 특권을 폐지시키고 평민에게도 공직이 개방되었다.

사회적 격변

과거 프로이센은 엘베강 동쪽의 슬라브족과 인접한 국경 지역으로 대규모의 토지를 주어 귀족들을 이주시켰다. 그래서 이 곳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는 ‘융커’라는 토지 귀족이 생겨나 있었다. 1807년의 칙령으로 이들 융커에게 예속되어 있던 농민들이 해방되고 토지를 소유하고 직업 선택의 자유도 주어졌다. 또 직종별 이익 단체로서 시장을 왜곡시키고 있던 길드를 해체하고 자유 노동시장을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다.

교육의 발전

국가 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이 설립되었다. 1809년 빌헬름 폰 훔볼트가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베를린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는 교육 개혁이 없는 관료제나 군대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교육을 통해 소극적인 국민을 가르쳐 자발적으로 국가 발전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훔볼트의 교육 철학은 교육에 관한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 철학은 다른 나라의 교육 시스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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